지구의 멸망은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봤을 땐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by 스탠리 큐브릭
평점 - ★★★★★
[한 줄 평 : 당신의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시놉시스
-식량이 떨어진 외계 행성에서 온 한 외계인이 '로라' 라고 하는 여인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녀는 길거리의 남자들을 유혹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신에게 잘 다정하게 대해주는 한 남자를 만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일단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판 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겠네요
포스터에 '그녀가 벗는다' 따위의 문구로 관객들 낚시질을 시전하려고 한 모양인데....
이렇게 잘 만든 영화에 저딴 짓거리나 하는 걸 보면 국내 유통사가 배운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딴 짓거리 하니까 <판의 미로> 처럼 잘 만든 영화가 흥행에서 폭망하잖아 이 개그튼긋들아
이런 영화에서 중요한 건 스칼렛 요한슨의 노출이 아니라 그 노출로 '무얼 말하고 싶은가' 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이나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를 보면서 그 그림들을 외설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 처럼요
1.형식이 스토리인 영화
-정말 까놓고 말해서, 만약 이 영화를 보실 생각이라면 이건 꼭 말하고 싶네요
이 영화는 '오락적 재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재미있는 영화를 찾으신다면, 이 영화는 피하는 것이 차라리 좋다고 말하고 싶네요
외계인이 등장하고, 사람을 유혹해서 식량으로 만든다는 설정은 굳-이 분류하자면 SF 쪽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영화에 그런 분류법은 굉장히 무의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물론이고 주인공 역할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의 표정 역시 상당히 절제되어 있어요
심지어 그녀의 이름은 영화 내에서 단 한 번도 불려지지 않을 정도에요
이전에도 늘 말하지만 주인공이라는 캐릭터는 영화의 스토리를 끌고 가면서 관객의 감정 이입을 돕는 역할이지만, 이 영화의 경우 관객들이 주인공처럼 '세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길' 의도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유적인 장면과 기묘한 미장센은 제가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게 만들어준 커다란 동기였습니다
2.예술이란 무엇인가
-저는 예체능은 정말 심각할 정도로 재능이 없는 인간입니다.
현대 미술이야 뭐 말 할 것도 없고, 이름난 거장들의 그림을 보더라도 딱히 뭔가 분석을 한다거나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그리 높지도 않아요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들은 좋아합니다. 화려하지만 한 편으로는 슬픔이 묻어져 나오는 그 묘한 느낌이 좋더라구요)
그렇기에 제가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금은 우스운 꼴이 될 것 같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예술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 을 그려낸 느낌이었어요
영화의 첫 시작은 두 개의 원이 서로 움직이면서 겹치더니 이내 그것이 눈동자가 되는 걸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라의 시선이 아닐까 싶어요
이후 알몸의 로라가 등장해 바닥에 누워있는 한 여인의 옷을 벗겨내 자신이 입게 됩니다
옷을 입는다, 라는 행위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습니다
'지구'라는 세상에서 보면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인 로라가 '지구'라는 세상에 녹아들기 위해 '인간'과 똑같은 외피를 입는 의식이요
재미있는 건 이 때 배경이 온통 하얀색으로 이뤄진 공간인데, 하얀색은 '모든 빛을 반사해서' 만들어지는 색입니다
우리는 영화의 엔딩 직전까지 로라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어요
그녀가 옷을 입기 전 몸에 쓰고 있는 '로라라는 여자의 모습'은 어쩌면 그마저도 다른 인간의 모습을 반사시켜 투영한 모습이라는 걸 의미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것이 바로 로라가 유혹한 남자를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데려가는 것이었어요
'모든 빛을 흡수하여' 만들어지는 색이자 죽음을 의미하는 색 답게 남자들을 천천히 흡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라에 대한 욕망으로, 죽음이 자신을 삼키는 지도 모른 채 그녀만을 바라보며 가라앉는 남자들의 모습은 저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네요
극 중 로라는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관념' 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모자라서 결국 기절하여 해안가로 떠밀려온 남자의 머리를 돌로 내리쳐 확실하게 사살하죠
심지어 그 남자의 어린 아기가 울고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아요
이 장면에서 아마 많은 분들이 '대체 뭐지?' 라고 당황하실 것 같은데, 저는 굉장히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외계인' 인 로라에게 인간과 같은 수준의 도덕과 윤리를 강요하는 건 그 자체가 이상한 일이죠
그녀에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식량임과 동시에, 초반 옷을 입을 때 자신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던 개미와 같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이렇듯 감독은 '로라' 라고 하는 캐릭터를 내세워 '예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에 대해서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었어요
예술은 세상을 똑같이 복제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완성된 세상을 조금 다르고 낯설게 바라보는 것 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예술은 '세상을 분해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축 하는 일' 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첫 번째 단계로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기' 를 제안하고자 한 건 아닐까 합니다
3.'정체성'은 무엇인가
-로라는 자신의 일에 대한 회의감이나 의심, 후회 등의 쓸데없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습니다
그저 이것이 자신의 일이며 당연한 것이라고 납득한 것처럼 행동하죠
하지만 우연히 자신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흉측한 얼굴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여태껏 연애 같은 건 단 한 번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죠
로라는 이번에도 그를 유혹하지만, 이내 알 수 없는 심경의 변화를 겪고 그를 풀어주게 됩니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언더 더 스킨> 인지 밝혀지는 부분이죠
비록 겉보기엔 그녀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엄연한 정체는 외계인 입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는 완벽한 이방인이며 사회에 녹아들 수 없는 소외된 존재에요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을 '여성' 으로서 대하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규정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지점이라고 생각되네요
영화 내에서 그녀는 기껏해야 작은 손거울로 자신의 화장을 고치는 정도로만 '(인간의 모습을 한) 자기 자신' 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이후 전신 거울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그제서야 '로라, 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 에 대한 객체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성은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한 남자와 만나면서 완성되지만,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아니라는 한계' 에 봉착했기에 결국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을 '포식자와 피포식자의 관계 전복'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긴 한데, 저는 그보다 좀 더 넓게 바라보면 결국 이마저도 관계성을 의미하지 않나 싶네요
산림 관리원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그녀의 '피부' 의 유무에서 바뀌니까요
여기에 먹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처럼 케이크를 먹으려고 시도한다거나, 음악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박자에 맞춰 두드리는 장면 등이 서서히 외계인에서 인간과 동일화 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 건 아닐까 합니다
4.살면서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영화
-그렇다고 이 영화가 추천할 만한 영화인가? 라는 질문에 저는 조금 망설여질 듯 합니다
저에게 있어 이런 식의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그 존재 자체가 꽤나 반갑거든요
하지만 세상에는 그저 재미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도 그렇고 뭐든지 조금 더 아는 것이 많고 보이는 것이 더 많을수록 즐거운 것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이렇게 다양한 영화를 접하는 것이 영화 인생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