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재미있는 영화는 참 많습니다
그 중에는 보고 나면 가슴에 길이 길이 남는 희대의 걸작이 있는가 하면,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냐' 싶은 쑤뤠기 같은 영화들도 있기 마련이죠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이 바닥엔 소위 'B급' 이라고 칭해지는 영화들이 있어요
뭐랄까.... 이게 거짓말로도 잘 만들었다고 하긴 어려운데,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못 만들었다고도 하기 어려운....?
싼 맛에 먹기는 한데 묘하게 중독성 있는 '불량 식품' 같은 그런 희한한 느낌이랄까요
오늘 감상글을 써보는 영화 역시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스토리 자체도 너무 단순합니다. 어릴 적 성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실어증에 걸린 주인공이 우연히 차를 얻어 탔다가 인신매매를 당해서 억지로 매춘부로 일하게 됐고, 저항하다가 결국 한쪽 눈까지 잃게 됩니다
결국 버려지자 자신을 괴롭힌 나쁜 놈과 또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이들에게 찾아가 복수한다는 극도의 단순한 스토리에요
복수극이라는게 참 감정적으로 뜨거운 영화이고 주인공의 고난 대비 복수씬이 강렬해질수록 거기서 오는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가 커지는 영화.... 이긴 한데
솔직히 이 영화, 잘 만들었다고 하긴 정말 애매한 영화였습니다
중반부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훈련하는 장면은 발연기의 연속이라 실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복수에 성공할 때 일부러 슬로우 모션을 넣음으로서 그 폭력성을 극대화 하는 연출은 뭔가 상당히 묘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보통 액션 영화들은 뭔가 빵빵 터지거나, 아니면 광속으로 질주하는 속도감으로 시선을 사로잡거나 하는데 이 영화에는 그런거 없습니다
근데 그게 오히려 저에겐 재미있었어요. 마치 '쌈박질 이라는 건 말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주는 느낌이었네요
물론 잘해줘야 B급 / 취향 안 맞으면 쓰레기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영화이긴 한데, 저는 오히려 신선해서 굉장히 재미있게 와닿는 영화였어요
그리고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실어증 이라는 설정 때문에 극 중 대사 한 마디 없습니다
하지만 눈에 찬 안대의 색깔이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으로 주인공의 감정 전달을 대신해주면서 동시에 독특한 캐릭터성을 확립해주고 있었어요
'상황에 따라 안대가 바뀌는 여자' 캐릭터라.... 왠지 낯이 익지 않으신가요?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빌>에서 주인공의 목표인 빌 못지 않은 존재감을 선보였던 '엘 드라이버' 입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애꾸라 불린 여자> 쪽이 원본이고, <킬빌>이 오마주이긴 하지만요
<킬빌>이 오마주로 똘똘 뭉친 영화라는 건 뭐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긴 한데 유독 매체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더군요 :(
아마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포르노 씬 때문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 (주인공 배우가 아닌 대역의 연기이긴 하지만)
p.s 쿠엔틴 타란티노가 킬빌 촬영 때 참고하라고 엘 드라이버 역을 맡은 대릴 한나에게 이 영화를 추천했더니..
대릴 : 감독님, 이건 포르노잖아요!
타란티노 : 맞아요. 하지만 좋은 포르노에요
뭔가 상당히 타란티노 답다,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