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기적이 너무 많이나서 운MAX찍고 하이패스 같은 인생을 살고간 사나이
한국은행 초대총재 구용서의 이야기이다
그는 도쿄상과대학에 졸업후 기적적으로 조선은행 공채로 들어간 조선인임
당시 일본 도쿄에는 조선은행 본점이 있었음
여기서 왜 조선은행 본점이 왜 경성에 있지 않고 도쿄에 있냐고 하면은
당시 일본은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1차대전 이후 일본은 직후에 반동공황이라는 불황이 직격함
문제는 여기서 조선은행이 기업들의 대출을 회수를 할때 금 교환없이 보증을 찍어냈었고
심지어 대출한 기업들의 실적이 죄다 악화된 상황이라서 회수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였고
당시 만주의 경제권도 조선은행이 관리를 하고 있어서 조선+만주의 불량채권을 전부 떠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듣고 일본의 대장성(재무성)은 진짜 극대노를 하게 되는데
불량채권의 액수를 너무 낮게 책정하고 비현실적인 정리방법만 제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빡친 대장성은 불량채권처리를 결국 자신들이 직접 관할하게 된다
그 보복으로 조선은행권의 일본은행권과의 교환 및 일본내의 조선은행권 유통금지가 때려졌고
조선은행의 관할권을 조선총독부에서 대장성으로 이관하고
조선은행 경성지점을 폐쇠하고 도쿄지점으로 모든기능을 이관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 보복조치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게 신입채용금지였다
원래 대장성은 조선은행을 눈엣 가시처럼 여기고 있어서 이 기회에 아주 갈갈이 찢어버릴 생각이였지만
조선은행의 존립은 천황의 명령이여서 구조조정 수순에서 끝이 나버렸다
그 결과 조선은행은 도쿄지점이 본점이 되고 50% 감자가 되고 1900명이였던 직원이 1100명으로 구조조정이 되는등
위신은 엄청나게 추락하게 되어버린다
그러자 엘리트 학생들 사이에서 돈도 많이주고 건물도 번쩍번쩍 하고 대륙에서 일할수 있던
조선은행은 비인기를 떠나서 기피회사까지 되어버렸고
조선은행도 구조조정중에 1925년부터 신입직원 채용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1925년 아무도 오지 않던 일본 현지 공채에서 딱한명을 뽑았는데
그가 구용서임
그런데 대장성의 신입채용금지조항은 거의 일본의 패망기때쯤에 어느정도 풀어져서
구용서는 1934년 후배인 백두진이 들어올때까지 조선은행에서 10년동안 막내생활을 했었다
(물론 이는 엘리트 코스에 한해서이고 나머지 지점의 직원들은 현지채용으로 채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구용서는 1944년 여수지점 지배인으로 승진을 하게 되는데
여수상공회의소장에게서 '조선사람끼리 잘해보자'라는 말이 밀정한테 흘러들어 헌병대에게 사상검증을 당했고
투옥을 할뻔 했지만 기적적으로 일본이사건으로 오사카 서구지점으로 좌천된다
그후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게 되는 과정중에 금융도 미군이 잡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중앙은행 권한을 조선은행에 맡길것인지 아니면 예전부터
민족자본으로 성립된 조흥은행에 맡길것인지 설전이 이뤄졌다
이과정에서 조선은행의 일본인들은 전부 빠져나가고
유일하게 일본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구용서의 선배들과 후배 백두진과 현지채용을 한 조선인들 밖에 남지 않았고
조흥은행은 이점을 파고들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조선은행 이사로 취임한 백두진은 서둘러 구용서를 일본에서 서울로 불러들였는데 갑자기 판국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청은 당시 재무를 담당하던 고든 중장 이후
조선인의 정부운영경험을 쌓기위해 재무장관에 조선인을 앉혀 놓게 되는데
하필이면 구용서의 선배이자 전 조선은행 직원인 윤호병이 재무장관에 않게 된다
심지어 그 당시에는 조흥은행과 대립하는 조선상업은행의 은행장이 재무장관에 앉게 된 것이였다
이렇게 된 이상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윤호병은 조흥은행의 은행장 정운용을 불건전 대출을 방임했다는 이유로 은행장에서 해임시켰다
이후 조흥은행은 중앙은행 쟁탈전에서 나가 떨어지게 되었고
이 절묘한 시기에 구용서는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그 후 두번째 상대가 등장하게 된다
조선식산은행이였는데
당시 조선은행과 당시 일본이 세운 은행이였다
그러나 조선식산은행은 자본은 비슷하지만 금융업의 경험과 노하우는 풍부했고
일본에서 엘리트코스를 밟고 올라온 사람들이 조선은행보다 많았다
일본인/조선인의 임금차별을 둔 조선은행과 달리 조선식산은행은 임금차별도 적었기에
내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영어를 말할 줄 아는 직원들이 많았다
그덕분에 미군정청은 식산은행과 제일 가까웠다
그러나 조선은행은 그동안 비밀리에 계획을 진행해 온게 있는데
바로 이승만,김구,이범석,여운영등 을 지원한 것이였다
구용서가 귀국하던 시기
작별인사차 방문했던 조선은행 도쿄본점에서
은행장으로 부터 특명을 받게 된다
바로 전쟁말기 일본은 조선은행권을 엄청나게 뿌렸는데
구용서는 도쿄 대장성에서 발행한 조선은행권 3억원을 경성지점으로 공수하라는 것이였다
그런데 여기서 또 기적 같은 운명을 만나는데
구용서가 3억원을 가지고 서울역에 내리는데 미군 장교를 딱 마주친것이다
원래 미군은 따로 군표를 만들어서 조선의 경제권을 재편하려고 했는데
구용서가 가지고온 3억원을 보고
돈이 이렇게 넉넉하니 따로 군표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조선은행권을 그대로 유통시킨다
아이러니하게 경성지점에서도 몰래찍던 조선은행권이 산더미처럼 더있었고
미군은 해방 후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방조를 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후에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이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구용서는 조선은행 이사가 되고 조선의 조선은행 원로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의외로 조선은행은 친일기관에 식민지통치기관이였지만
처음에는 김구 세력과 친했었다
왜냐하면 당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신 장개석이
김구 선생에게 전별금으로 6000달러나 건네주었다
김구측은 6000달러를 조선은행을 찾아가 비밀리에 환전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리고 당시 이사진들은 미군정의 법령에 위반되는 부탁을 소리소문 없이 처리를 했고
김구는 경교장에 그들을 불러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든 재무장관이 퇴임하기전에 인사를 단행하고 갔는데
그중에 최순주라는 이승만 세력의 인사를 꽂고 퇴임을 해서 어느정도 이승만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후에 이범석은 조선민족청년당을 조직하기 위해 미군정을 찾았고 미군정은 조선은행에게 그에게 대출을 하라고 권유를 한다
또한 여운영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도 조선은행에 부탁을 한적이 있었다
그 후 미국에서도 한국의 정부수립 이후
현대적인 중앙은행 체계가 필요하다고 느낀 미정부에서
블룸필드 박사를 직접 인사로 파견하게 된다
그는 한국은행법 초안을 만들면서 여태껏 미군정과 큰일을 해왔던 조선은행을
중앙은행으로 만들것을 결정한다
동시에 사건이 터지는데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이라고 흔히 말하는 북풍공작사건이였다
이 사건으로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까지 이승만 정권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결과 국무총리 이범석이 사퇴하는등 여러인사들이 경질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은행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전직 총재가 경질되고 얼마나 행운이 좋은지 구용서가 조선은행의 새 총재로 임명되었다
이때가 1950년 5월이였다
그 후 1950년 6월 9일 한국은행법이 통과되고
조선은행은 한국은행으로 개칭되게 되지만
2주뒤에 전쟁이 일어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