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영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 장 뤽 고다르
[한 줄 평 : 혈관을 차갑게 얼려버리는 미치도록 뜨거운 광기]
평점 : ★★★★☆
아마 재작년 쯤? 이었던 걸로 기억하네요
인터넷에 갑자기 '고어 영화 등급표' (정확히는 불쾌한 영화) 라면서 빙산에 비유한 영화 목록 짤이 돌아다닌 걸 기억하는 분들이 있으시지 않을까 싶네요
[혹시 잊으신 분들이 계실지도 몰라서 첨부]
사실 제가 이 사진을 처음 보고 했던 생각은 '왜 여기에 포제션이 없지?' 라는 생각이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살면서 영화를 보다가 처음으로 꺼버릴 뻔 할 정도로 감상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영화였거든요
(제 생각이긴 하지만 <살로 소돔 120일> 이나 <안티크라이스트> 와 동급이 아닐까 싶네요)
줄거리는 간략합니다
전쟁 기간 동안 스파이로 활동했던 마크는 스파이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내인 안나는 그를 딱히 반기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그녀와의 관계를 다시 돌리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안나는 어린 아들인 밥까지 내버려 두고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죠
결국 사립 탐정을 고용하지만 그 탐정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러던 중 마크는 안나와 똑같이 생긴 밥의 담임 선생님인 헬렌에게 자신도 모르게 끌리게 됩니다
1.미치지 않고는 이런 연기를 할 수 없다
-배우 샘 닐이야 옛날부터 광적인 연기를 잘 하는 걸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배우이긴 합니다만 이 영화에선 그보다 이자벨 아자니의 연기가 더 돋보였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미친 듯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미친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요
초반에는 그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싶었던 이자벨 아자니의 모습은 중반부터 스크린을 장악하는 걸 넘어서 거의 날뛰기 시작합니다
그 콧대 높은 칸 영화제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에는 이견을 달 수 없을 정도로요
2.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다크 나이트에 나왔던 조커의 대사 입니다. 조커라는 캐릭터의 능글맞은 면과 뒤틀린 유머 감각이 돋보여서 그 유명한 "Why so serious?" 보다 더 좋아하는 대사이긴 한데
이 영화에 이보다 어울리는 대사는 없을 듯 하네요.
이 영화는 정말 말 그대로 이상한 영화에요. 애초에 관객의 이해 따위는 포기한 영화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네요
영화 속 안나가 바람을 피웠던 '그 대상' 이 알고 보면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이상적 배우자였다는 점에서, 어쩌면 감독인 안드레이 줄랍스키가 겪은 아내와의 이혼이 분명 이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서 아내를 앗아간 상대가 마치 괴물처럼 보였던 것을, 이 영화에 이렇게나 기괴하게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첫 시작부터 등장하는 베를린 장벽은 이미 안나와 마크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신조차 외면해버린 안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오는 고통은 그 유명한 '지하철 장면' 을 연출하게 만듭니다
3.그럼에도 안타까운 이야기
-마크는 끊임없이 안나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합니다
안나가 고기 자르는 전동 톱으로 자해를 하자 그녀를 치료해주고 자신의 몸에 똑같은 상처를 내면서 '제발 나를 좀 봐줘' 라고 할 정도로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차가운 '파란 눈'은 마크를 그저 밀어내기만 할 뿐, 이와 달리 따뜻하고 포용할 줄 아는 '초록 눈'을 가진 이상적인 모습의 헬렌에게-사실 이자벨 아자니의 1인 2역이지만-마크가 끌리는 건 어쩔 수 없고, 또 마냥 덮어놓고 욕하기도 참 애매한 영화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더 혼란스럽습니다
관객이 어느 한 쪽에 감정 이입을 할 수가 없어요. 감독이 그럴 여지를 주지 않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요
결국 엔딩에 이르러서야 모든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나 늦었다는 걸 알았고, 또 그것이 감독이 처한 현실이라는 걸 깨닫기에 더더욱 안타까운 이야기일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네요
p.s 박찬욱 감독님이 <박쥐> 촬영 때 김옥빈 씨에게 참고하라고 권해준 영화가 이 영화입니다
다만 본인도 "정신 건강에 해로우니 이런 건 너무 자주 보는 건 안 좋다" 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0
p.s2 <박쥐>에서 김옥빈 씨가 맡은 태주가 입은 파란색 드레스가 이 영화 속 이자벨 아자니의 오마주 입니다